수리암호학 개론

암호는 비밀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기원전 1900년경 이집트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형 문자 암호문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암호문이다. 그러나 비밀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수단이 암호라면, 암호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중에 우리 부족만 이해할 수 있는 길 표시를 한다든지, 전령의 성별에 따라 플랜-B의 사용 여부가 정해져 있다든지, 결사 대원끼리만 통하는 수신호를 주고받는다든지 등등 인류는 실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비밀 정보를 교환해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학적 모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암호들이 등장했고, 암호의 해독, 더 나아가 분석에도 수학적 기법들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후부터 암호 이론의 수학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 암호 이론은 수학의 한 분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현대 암호는 수학의 기초 지식 없이는 접근조차 어렵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암호 체계의 개발과 분석을 위한 새로운 수학 이론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을 정도로 암호는 수학의 바탕 위에서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한 발전에 힘입어, 현대 암호는 비밀 정보의 교환이라는 전통적인 기능에 더해 예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다양한 기능들을 갖추고 새로운 분야로 그 응용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혀가고 있다. 예를 들어 사전에 비밀키를 공유하지 않고도 암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개키 암호 체계가 개발되어 디지털 서명이나 인증에 중요하게 쓰이고 있으며, 암호화된 데이터에 대한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동형 암호가 개발되어 데이터에 담긴 정보의 노출 없이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해시 함수가 블록체인과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 화폐의 원천 기술로 각광받고 있으며, (초)경량 암호는 자율 주행 자동차나 지능형 로봇, 스마트 기기 등이 수집하고 처리하는 정보를 해킹으로부터 보호하는 핵심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불법 사용자를 추적하고 축출하는 기능을 가진 송출 암호가 개발되어 디지털 컨텐츠의 유료 송출 또는 인터넷 유통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디지털 기기에 저장된 범죄 증거를 복원하는 디지털 포렌식 기법이 개발되어 범죄 수사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이 책은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수리정보과학과에 입학한 신입생들이 처음 수강하는 교과목인 ‘수리 암호’에서 저자가 강의해온 내용을 엮어 만든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수학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거나 부족한 학생들이 현대 암호에 대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암호 공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수학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정수론과 대수학의 기초가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