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과 은둔

시인 김지하의 생활의 실감이 물씬 묻어나는 새 시집이 나왔다. 2002년 여름 무렵부터 2년 여 동안 문예지에 발표한 시편들에 전작으로 씌어진 30여편을 더해 90여 편의 시를 엮은 것. 기존의 시집들이 시대의 전위, 사상가이자 운동가로서 시인에 대한 화려한 수사로 인해 보통의 삶과 밀착한 시적 실감이 덜했다면, 이번 시집은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시인의 깊은 사유가 담백한 시어와 매임 없는 형식을 만나 깊은 울림을 형성한다. 이번 시집의 주요 축은 죽음에 대한 사유이다. 1부에 묶인 시편들은 인간의 숙명인 생로병사의 한계 앞에 선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담고 있다. 또 시인이 현실 문제에 여전히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2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9·11 사태, 동북공정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부안 핵폐기장 건설 반대 시위 등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서 촉발된 사유가 녹아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3부는 선(禪)적인 것과 불(佛)적인 것을 아우르는 고졸한 미의 세계를 보여주는 연작들이 중심을 이루는데, '작은 담론 안에 요동하는 우주를 담는' 사랑의 미학과 광화문 촛불시위의 눈부신 부드러움이 한데 엮이는 광경, '새로운 처음'을 찾아 나아가는 결단의 모습이 드문 감동을 전한다.